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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6·10만세의 의의와 역사
| HIT : 1,950
6·10만세의 의의와 역사
    1926년 4월 26일 마지막 임금인 순종임금마저 세상을 떠나시니 망국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가와 학교는 문을 닫고 농부들은 농구를 놓고 애도와 추모속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궐기한 것이 6·10만세 운동의 발단이었다. 이때 10만장의 삐라를 인쇄하였는데 이 내용은  우리 교육은 우리들 손에 맡기라.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라.  토지는 농민에게 돌리라.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라 등으로 되어 있는데 사전에 발각되었으나 계속 독립의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한민족의 불굴의 기개를 중외에 천명하였다.

[참고사이트]
- 국사수업자료모음 : http://guno.pe.kr/03classdata/classdata8_5.htm
- 오늘의 한국 : http://www.koreascope.org/ktext/sub/1/1/index1-i.htm

※ 6·10만세 운동의 의미
  6·10만세 운동은 1926년 6월 10일 대한민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인산일을 택하여 일어난 항일독립만세 운동으로 병인만세 운동이라고도 한다.

※ 6·10만세 운동의 원인
  3·1운동 이후 일제의 교묘한 문화 정책은 민족주의 애국지사들을 더욱 탄압하였으나 민족 의식은 더욱 성숙되어 갔다.
  이때 마침 1926년 4월에 대한 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별세하자 서울의 각급 애국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구국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 6·10만세 운동의 계획
  6·10만세 운동은 대개 세 갈래의 학생 조직이 이 계획에 참여하였다. 공산주의 계통의 노공계, 전문 학생을 중심으로 한 사직동계, 중앙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통동계 등으로 이들은 각기 다른 양상을 띄면서 만세운동을 서둘렀다.
  노공계는 공산주의 계통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오설, 박내원 등이 중심이 되어 일제 타도, 식민지 철폐, 납세 거절, 노동자의 총 파업, 8시간 노동제 실시 등의 격고문을 인쇄하여 6월 10일에 뿌리고 독립 시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이 계획은 사전에 일본 관헌에 탐지되어 권오설 등 20여명이 구금되어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직동계는 이병립, 이천진, 이선호 등을 중심으로 계획하였다.
  <2천만 동포여 원수를 몰아내라! 피의 값은 자유이다. 위대한 독립만세!> 등의 경고문을 만여장 인쇄하여 준비하였다.
  통동계는 박용규, 이동환, 김재문, 황연환, 곽대형 등을 중심으로 순수한 애국 학생들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이들은 격문 3만여 장을 인쇄하여, 이를 중앙 및 휘문 고보생들에게 돌려 인산봉송로에서 이를 뿌리고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와같은 세갈래의 운동계획은 성숙되었으나 노공계는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관련자의 대부분이 체포·구금되어 실패로 돌아갔고, 6·10만세 운동은 사직동계와 통동계의 학생들에 의하여 구금되었다.

※ 6·10만세 운동의 전개
  6월10일 순종의 인산날 노공계의 계획탄로로 일경들은 긴장되어 육·해군 5천을 동원하여 행군시위하면서 시민을 위협하였다.
  3·1운동과 같은 독립 운동으로 확산한 것을 막으려고 발악적인 수색을 단행하였다.
일제는 세계의 이목이 두려웠던지 서울시내 중등 학생을 2만 3천여명 동원하여 인산길 좌우에 도열시켜 대여를 봉송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마·사복 경찰이 2·3중 포위하여 경계하였다. 30여만명의 국민들이 인산행렬을 지켜보았다.
  아침 8시 30분 인산 행렬이 단성사 앞을 지날 때 4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뿌리고 만세운동의 서막을 올렸다.
  태극기도 학생들에게 나뉘어졌으나 50여명의 학생들이 현지에서 실패했다. 대여가 오수 2시 20분경 동조 부근에 이르렀을 때 통동계 학생들이 700여장의 격문을 살포하면서 대대적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독립 시위운동은 결정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일경의 철저한 감시와 경계 아래에서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만세 시위운동은 끊이지 않았고 일경에 체포된 학생들은 210여명이 되어다. 그리고 이날 뿌려진 격문은 전국적으로 10만여 장이나 되었으며 지방도 고창 고보를 비롯하여 순창·진주·울산·평양·홍성·공주에까지 파급되었다.
  이때 구속된 210여명 가운데 78명이 이른바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6월 14일 검찰에 송치되었다.

※ 6·10만세 운동의 결과와 영향
  6·10독립만세 운동은 결국 민족 진영의 적극적이며 유기적인 횡적·종적 조직이 약하여 전 민족적 연합 궐기의 조직적 동원이 불가능했고, 또 일부 사회주의자의 침투로 사전에 발각 구속되는 등의 이유로 결국3·1운동과 같은 거족적 독립 시위운동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온 겨레의 독립운동 등으로 되지 못하고, 조국과 민족을 염려하는 애국 학생들의 분산된 조직대로 제약된 연락을 간직한 채 시가지로 확대하여 격분된 시민의 호응과 참여를 호소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이 6·10만세 운동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7년 3개월만에 일어난 민족의 독립에의 염원을 대변했으며 이 운동은 다시 3년 5개월 후 광주항일 운동의 선구적인 봉거의 역할을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학생 중심의 구국 운동은 당시 자칫 무력해져 가던 민족 진영에 자극과 활력과 경각심을 환기시켜 범민족 운동의 단일체인 신간회, 근우회 등의 조직을 가져오게 한 테에도 큰 영향이 미쳤다.

[6.10만세 운동 관련 훈화자료]
오늘은 6·10만세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보겠어요.
  6·10만세 운동은 1926년 6월 10일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우리 민족의 울분을 독립 만세로서 폭발시킨 운동이었답니다.
  6·10만세 운동은 순종 황제의 인산날을 기하여 주로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에 전파되어 국내 방방곡곡은 물론 멀리 간도 지방까지 운동이 전개되었답니다.
  이 운동은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주 독립의 쟁취를 위해서는 죽음으로써까지 항거하여야 한다는 우리 민족정신을 그대로 나타낸 점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6·10만세 의거일 맞이하여 조상들이 남겨 놓은 독립 자존의 정신을 받들어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조국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하는 참된 국민이 되기를 다짐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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